아니마(Anima)의 몽상, 그 발견된 이미지의 세계
長江 박옥생 (미술평론,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1. 발견된 이미지, 풍경으로의 몽상(夢想)
Helen Chung Lee는 우연한 사물 속에서 자연의 형상을 채집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사물은 겹겹이 중첩된 시간의 층위가 선명한, 매끄럽고 반질거리는 전복 껍질의 내부와 같은 자연의 부분이다. 이 작은 사물 속에서 확장된 세계의 풍경이 포착된다. 사진을 공부한 작가는 전복 속에서 화려하고 신비하게 펼쳐진 풍경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고 다시 회화로 옮긴다. Lazertran이란 인화지에 사진을 프린트 한 후, 물속에서 인화지만을 베껴내고, 베껴진 이미지들은 캔버스에 정교하게 옮겨지게 된다. 그 옮겨진 이미지들은 Gel Medium으로 견고하게 부착되고 그 위에 아크릴로 영구적인 회화로 변환된다. 이 과정 속에서 클로즈업된 작은 사물의 풍경은 살아있는 시간의 움직임과, 영원과 꿈과 같은 현실과 초 현실을 넘나드는 풍부한 표정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로 완성된다. 이 세계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마치 현실의 공간을 닮았지만 닮지 않은 듯 고요하고 몰입된 세계이다. 이를 통해 전복껍질의 작은 부분에서 자연의 전체를 보여주고, 자연이 살아 온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꿈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몽상가의 시 · 공간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진을 캔버스에 옮기는 이 수고로운 작업들을 통해 놓칠 수 없는 발견된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었던 Hide & Seek - Wood 시리즈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옹이진 나무의 나이테를 포착한 화면에는 사람, 동물, 자연의 풍경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풍경들은 현실의 모습과 닮았지만, 추상 속에서 구상을 발견하는 듯 신비하고 미묘한 모습들이다. 이렇듯 작가는 나무, 전복과 같이 오래된 시간이 축적 되어진 사물의 결을 통해 세상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 이야기들을 화면에 옮김으로써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움직이며 숨 쉬는 순간으로 변환시킨다. 마치 바다가 출렁이고 물결이 휘말리고 빛은 산란되는 것처럼 말이다.이렇듯 전복의 이미지들은 물과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데, 전복은 바다의 오랜 시간을 품고 바다의 수많은 표정들을 끌어안고 자라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물 가운데 전복의 매끈거리고 아득한 무늬에 주목한 것은 작가의 내면의 무의식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전복 껍질의 내부가 가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칠공예의 하나인 자개이듯이 그 매혹적인 색의 변주도 주목할 만하지만, 전복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진주를 품고 자라나게 한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무의식중에 자신의 어머니의 삶과 희생, 사랑이 전복의 형태와 색상, 생명의 본성과 동일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어머니의 삶을 통해 체화(體化)된 물에 관한 어떠한 이미지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연히 발견된 사물 속에서 포착한 화면들은 작가의 무의식중에 논리적으로 잉태된 화면들임을 알게 된다. 작가의 전복과 물의 몽상은 어머니의 삶과 어머니에게로 나아가는 지극한 모성의 한 부분에서 발로된 것이며, 그것의 극대화된 표현들이 물과 바다의 아득한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견된 작은 사물을 증폭된 세계로 확장시킴으로서 작가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따뜻함, 그리움, 안락의 세계와 같은 내면의 희구를 증명하고 확인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작가는 우연 속에서 필연적인 아니마(Anima, 영원한 어머니의 母性)를 꿈꾸고 그리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2. 사진에서 회화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작가가 Lazertran기법을 사용해 불규칙한 곡선들로 가득한 이미지들을 회화로 옮겨내는 작업들은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모색으로 보인다. 사진이 현존(Presence)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끊임없이 회화를 위협해 왔지만, 현존의 순간을 붓과 안료로써 핍진한 그리기의 과정 속에서 이미지화하고 화면에 고착화시킨 회화는 영원으로의 시간과 확장된 세계를 보여준다. 사실, 작가의 창작과정은 사진에서 회화로, 현존(Presence)이 부재(Absence)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잉태되는 상상력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존의 기록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확장된 영역 안에서, 존재의 사실은 희석되고 부재에서 증폭되는 초현실과 같은 몽상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작가의 화면에는 기하학의 곡선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같은 현상학자는 기하학적 형태 그 자체가 꿈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불규칙한 곡선들은 현실이 초 현실이 되고 있으며 또한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조각조각 나누어 고착시킨 캔버스에 확대된 이미지들은 원래의 크기를 넘어서는 압도하는 자연의 위압감과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요하거나 요동치는 형상들 속에서 현실이 초현실로,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나아가는 꿈과 같은 몽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것은 초월의 한 방법적 모색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아니마를 담은 이미지들에게서 창작의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순간을 만나고 경험하고 이를 조형화 하는 듯하다. 그 순간은 창조의 영감을 터트리는 몰입의 상태이며 디오니소스적인 엑스타시의 상태, 신(神)과 만나는 그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 곳곳에는 산포되어 있는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영혼의 숨소리가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어쩌면 Helen Chung Lee의 작품세계는 오롯하게 몰입된 미적관조의 순간이 내재된 이미지의 발견과, 그 발견된 형상을 순간에서 영원으로 각인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다. 옹이진 나무의 오래된 나이테에서, 전복 껍질 내부에 분포되어 있는 빛나는 물과 바람의 흔적들에서 몰입의 순간, 신이 거(居)하는 그 지점의 시 · 공간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 발견된 이미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비현실, 초 현실의 확장된 꿈의 세계이며,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세계, 순수하고 기원적인 시간과 공간이 열리는 순간이며 장소인 것이다. 리차드 하만(Richard Harmann)이라는 미학자는 지각은 고립화하고 집중화하기 때문에 결코 대상의 표면위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내부까지 통찰하여 그 본질을 직관함으로써 자연의 마음에로 지향하게 된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연의 마음과 만남으로서 자신을 몰입하고 확대시켜 무한한 경계에로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화면에는 신이 존재하는 공간, 인간의 안락을 위한 시간이 숨 쉬는, 본질을 뚫고 지나가는 무한한 세계의 순수한 형상과 자유가 가시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장된 풍경에서 경험하게 되는 압도하는 자연의 숭고함과 닮아 있으며, 비밀 세계의 빗장을 열고 무한의 아름다움과 요동치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복의 매끈거림과 오묘한 색이 만남으로서 그 신비는 증폭되고 있다. 그래서 Helen Chung Lee의 작품에서는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뜨끈하고 드라마틱한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보여주는 무한 세계의 작은 사물에서 발견된 이미지들이 회화로 변모되어 드러나는 확장된 세계의 변주가 앞으로 기대가 된다 하겠다.